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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브라운 - 하편 역사




캔자스 전투 이후 동부로 돌아온 존 브라운은 노예제 폐지론자들에게 유명인사가 되어있었어요.

저명한 기업가이자 상인 조지 워커와 만난 브라운은 조지에게 토머스 히긴스, 시어도어 파커, 루터 스티언스, 윌리엄 게리슨, 새뮤얼 하우 6명의 부유한 기업가를 소개받았는데 이들은 모두 노예제 폐지론자들이었죠.

브라운은 6명의 부자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거금을 지원해 달라 부탁했고 이 자금은 이후 하퍼스 페리 습격사건에 쓰이게 되어 이 6명은 '비밀의 6인'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브라운이 돈의 사용목적을 묻지 말라 했기에 이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었을지는 알 수없지만 브라운의 성격과 전례를 볼 때 어느 정도는 예측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일은 계속 진행되어 1853년 1월 7일 노예 해방 단체에서 샤프스 라이플 200정과 탄약을 브라운에게 지원하기로 하고 코네티컷의 찰스 블레어란 사람은 1천정의 창을 지원해 주겠다 약속했는데 막대한 숫자에서 볼 수 있듯, 이는 노예를 해방시켜 무장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어요. (천정의 총은 너무도 비싸니까요)


한마디로 브라운은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대량으로 얻은 다음 그 무기로 노예들을 무장시켜 노예주에서 노예들을 모두 해방시키려 했죠.

그와 뜻을 함께하는 동조자들이 모였지만 이들 대부분은 군사 경험이 없었는데 이를 위해 이탈리아 내전에서 싸웠던 영국인 포브스를 교관으로 초빙했지만 포브스는 임금 문제로 브라운과 싸운 뒤 결별했고 포브스가 계획을 중앙정부에 밀고하겠다 협박하자 다급해진 브라운은 앞으로 해방시킬 새로운 주의 헌법을 바로 작성하곤 '노예제의 심장' 남부 버지니아로 향했어요.







1859년 7월 3일 하퍼스 페리에 도착한 그는 스미스라는 이름으로 메릴랜드의 농가를 하나 빌렸는데 대부분의 동지들은 그의 연락에 응하지 않았고 기대만큼 사람이 모이지 않자 그는 낙담했어요.

원래 계획은 4500명, 즉 1개 여단을 동원하는 것이지만 브라운에게 찾아온 동지들은 21명 뿐이었거든요.
16명의 백인과 5명의 흑인 (흑인 중 3명은 자유인, 한 명은 해방 노예, 한 명은 도망 노예였어요)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는 49세 가장 어린 사람은 21살이었고 절반가량은 캔자스에서도 브라운과 함께 했던 오랜 동지들이었어요.

상황은 절대적으로 비관적이었고 성공 가능성은 없었죠.

흑인이자 노예해방 동료인 더글러스 역시 불가능한 일에 자신과 동료들의 목숨을 버리지 말라며 브라운에게 포기를 간곡히 부탁했지만 브라운은 이 무모한 일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어요.

마침내 1859년 10월 16일 브라운은 18명을 이끌고 하퍼스 페리 조병창을 공격했는데 하퍼스 페리는 커다란 군기지와 마을이 있는 거대한 무기고 단지로 미 연방군의 각종 머스킷과 라이플10만 여정이 저장되어 있었죠.
스케일에서도 볼 수 있듯 그는 노예제 자체를 붕괴시키려 했어요.

하퍼스 페리읍으로 들어서는 브라운 일당은 아무 저항도 받지 않았는데 그는 전신 선을 끊고 초병 한 명이 지키고 있던 조병창을 손쉽게 점거한 다음 주변 농장으로 부하들을 보내 "해방이 가까워졌다" 선포하고 노예주들을 인질로 잡아왔어요. 하지만 흑인들은 호응하지 않았죠. (여기엔 더글러스의 영향도 있었어요, 그는 무모한 시도가 많은 피를 뿌리는걸 걱정해 흑인들에게 거사참여를 하지 말라 부탁했죠)

그래도 순조로워 보이던 거사가 틀어진 건 열차가 하퍼스 페리 역에 들어서면서 부터였는데 열차가 들어오자 역의 수화물 담당자 셰퍼드가 소리치며 달려가 조병창이 습격당했다고 외친 것이죠.
브라운의 부하들이 소리치며 총을 쏘자 셰퍼드는 즉사했는데 아이러니한 건 그 역시 해방 노예였단 거예요.
사망자가 생기자 브라운은 무슨 생각에서 인지 열차를 인질로 잡지 않고 그냥 보내주었는데 덕분에 하퍼스 페리가 습격당했단 소식이 순식간에 퍼졌죠.

워싱턴이 움직이기도 전에 지역 농장주와 지역 소상인으로 이루어진 민병대가 개미떼처럼 우르르 몰려와 조병창에 브라운 일행을 포위한 다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어요.
 모든 게 끝났다 생각한 브라운은 아들과 싸우기 어려운 지지자들에게 백기를 주어 항복하게 했지만 성난 군중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모두 죽여버렸어요. 



화약연기속에서 전장총과 기병총이 터지며 번쩍이자 총성이 조병창을 허물어뜨릴듯 울려대었고, 브라운도 응사했어요. 순간 소리를 내며 날아온 총탄에 또 다른 아들 올리버가 총상을 입었고 부러진 탁자처럼 천천히 브라운의 품으로 쓰러졌죠.
아들이 고통에 가득 찬 표정으로 헐떡이며 "날 쏘아 고통을 덜어주세요 아버지"라 말했지만 브라운은 애써 냉정을 참으며 "죽어야 한다면, 사나이답게 죽거라"라 대답했어요. 노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차분했고 눈동자는 슬픔으로 가득찼지만 한편 그 표정엔 엄숙함이 서려있었죠. 올리버는 다행히 오래 고통받지 않았어요 2분뒤 죽었죠. 잠시 부자를 바라보던 동지들은 총탄이 날아오자 고개를 돌려 응사했고 총성은 밤새 이어졌어요.

그들의 싸움은 끔찍하지만 장렬하고 어리석지만 성스러웠죠.



그리고 마침내 18일 아침, 연방 육군 로버트 리 대령 (훗날 남부 장군 로버트 리가 맞아요)의 미 해병대 1개 중대가 도착해 조병창을 포위했죠.
아직 화약연기가 가시지 않은 조병창의 마당으로 육군 중위 젭 스튜어트가 백기를 들고 다가가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라 말하자 
브라운은 호기롭지만 지치고 갈라진 목소리로 "차라리 죽겠다"라 답했어요.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고 해병대는 망치와 급조된 공성추를 이용해 조병창 문을 부수고 들어가 순식간에 브라운 일행을 제압했는데, 브라운도 해병에게 구타를 당해 머리에 부상을 입었죠. 이들은 지난 전투로 모두 부상을 입거나 녹초가 되어있어서 저항조차 하기 어려웠어요.

하퍼스 페리 공격으로 10명의 브라운 일행이 죽고 4명의 반대파가 죽었는데 브라운의 부하 중 5명은 탈출하는데 성공했어요.








브라운이 추종자들과 함께 체포되자 버지니아 주지사 헨리 와이즈는 신속하게 움직였는데 노예 찬성론자였던 그는 중앙정부가 "하퍼스 페리는 연방건물이다"라는 이유로 브라운 일당을사면하거나 낮은 형량을 내리는 걸 원치 않았어요.

그와 남부인들에게 브라운은 남부의 안전을 해치는 위험인물이고 악마의 조종을 받아 성스러운 질서를 파괴하려 하는 사악한 마술사였죠.

그는 브라운 일행을 찰스타운 군으로 압송한 다음 의사가 브라운이 재판을 받을 수 있다 말하자마자 바로 주 법원에서 재판을 시작했는데 브라운은 백인 네 명과 흑인 한 명을 살해하고 노예 반란을 조장한 '공모죄', 버지니아 주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되었어요. (백인 네명은 민병대였는데 전투중 사망했죠)

브라운의 변호사는 "브라운이 직접 죽이거나 죽이라 명한 사람은 없다" "브라운은 버지니아 주민이 아니기에 충성의무가 없고 반역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습격이 실패했단 건 그가 노예들과 공모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라 주장했지만. 모두 기각되었고 브라운은 교수형 판결을 받았죠.

애초에 '노예주의 노예제 법원에 의한 노예제를 위한 법원'에서 공평한 판결은 불가능했어요.

브라운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허락받았는데 일전에 캔자스에서 그가 죽였던 도일 가문의 미망인 마할라 도일은 편지로 "당신의 사악한 행각이 끝장나서 기쁘다, 아들과 함께 당신의 처형장에 가길 학수고대한다"라며 그를 조롱하기도 했죠. 
하지만 다른 더 많은 사람들과 주고받은 브라운의 편지들은 그가 단순한 미치광이 테러리스트가 아닌 성스러운 신념가이자 도덕적인 사람이란 걸 말해주고 있어요.
그 편지들이 인쇄되어 책으로 출간되자 남부 백인들에게 격노한 북부의 수많은 백인들이 노예해방론자로 변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죠.

놀랍게도 감옥 내부까지 침투한 캔자스 출신의 동료 사일러스 솔이 그를 탈출 시키려 했지만 브라운은 대답했어요 "나는 도망치기엔 너무 늙었어, 차라리 순교자로 죽음을 받아들이겠네."

그동안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존 브라운의 구명을 요청하며 글을 썼는데 이는 남북전쟁을 예고하는듯해요.

' 존 브라운을 죽이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다. 그로 인해 연방에 내재되어 있던 균열이 드러날 것이고, 종래에는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브라운의 몸부림으로 인해 당장은 버지니아 주의 노예 제도가 강화될지 몰라도, 결국은 미국 전체의 민주주의를 뒤흔들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부끄러운 줄을 아시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들 스스로 그대들의 영광을 쇠하게 하리라. 도덕적으로 말해 보건대, 자유에 의해 해방이 암살됨을 누구든 보게 될 그날, 인간 존재의 빛이 꺼져 버리고, 정의와 불의에 대한 관념이 어둠 속으로 숨어버릴 것이다. 
미국인들이 이것을 숙고했으면 한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보다 더 공포스러운 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워싱턴이 스파르타쿠스를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12월 2일 처형일 아침 브라운은 마지막 글을 남겼어요.

“나 존 브라운은 이제 이 죄 많은 나라가 저지른 범죄는 피로 씻어내지 않는 이상 지울 길이 없음을 확신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나는 마땅히 뿌려야 할 피를 충분히 뿌리지 않고 헛되이 자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성경을 읽고 유언을 포함한 마지막 편지를 아내에게 쓴 뒤 11시 정각에 감방에서 호송되었죠.


몇 km 떨어진 작은 풀밭에 선 교수대엔 나이 든 노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2천 명의 무장한 병력이 도열해 있었고
그 사이엔 이후 남부 장군으로 유명한 스톤월 잭슨과, 링컨 암살범이 되는 존 윌크스 부스가 있었죠 (부스는 군인이 아니었지만 일부러 처형식을 구경하러 군복을 빌려 입고 나왔어요) 

처형식엔 목사가 으레 동행을 하지만 브라운은 노예제에 찬성하는 성직자 따위는 필요 없다며 거절했죠. (남부 성직자들은 노예제에 찬성했어요)

사실 당시 처형장은 일종의 집단 광기에 빠져있었고, 노예제에 반대하는 성직자가 있었다 해도 살해 위협 때문에 브라운을 방문할 수 없었을 거예요. 남부인들은 모두 흥분해 북부인 기자들까지 모두 쫓아낼 정도였으니까요.
남부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화상에서 구하기 위해 난로에서 떨어뜨려놓듯 사악한 악마 존의 처형식을 보는 걸 막으려 했지만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처형장에 데려갔죠.
그가 보안관들에게 압송당해 나타나자 백인 군중들은 군인들 너머로 소리치며 브라운에게 증오의 말을 쏟아내었어요.

하지만 브라운은 당당한 태도로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용서했죠.
그는 군중이 내지르는 환호와 웃음소리 속에 목이 매달렸어요.


남부인들이 일제히 웃으며 환호하는 동안 북부에선 추모의 종소리가 울리었고. 흑인 노예들은 눈물지었죠.

그의 흑인 동지이자 하퍼스 페리 습격에 반대했던 프레드릭 더글러스는 검고 주름진 뺨 위로 눈물을 흘리며 
“그의 열성은 나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위대하였다. 나의 가느다란 빛살과 비교했을 때, 그는 불타는 태양과 같았다. 나의 신념은 시대에 속박되어 있었지만, 그는 끝없는 영원의 해안가까지 뻗어나갔다. 나는 노예들을 위해 살았지만, 그는 노예들을 위해 죽었다.”라 말했죠.








그를 둘러싼 갈등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어요, 가망없는 싸움에 스스로를 희생시킨 광신도, 혹은 성인이자 영웅.
과연 그의 죽음이 낭비였을까요? 



악마가 죽자 남부 농장주들은 만족과 안정감을 느꼈어요.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다르게 사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죠.

정치가들과 언론 일반 시민들까지 모두 양쪽으로 나뉘어 그가 미친 광신자, 혹은 미국의 죄를 홀로 짊어진 순교자라며 싸웠는데 이는 분열될 대로 분열된 미국을 둘로 가르는 나무 말뚝이나 다름없었어요.

남북전쟁을 단순히 산업화 북부와 농장제 남부의 경제 싸움일 뿐이라 정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건은 그렇게 간단하진 않아요.

당시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노예제를 거부하지 않았고, 스스로의 삶과 이득을 위해(혹은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고통과 불의에 찬 세상을 일부러 못 본 척했죠.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러지 않았어요.



브라운의 죽음으로 역사의 시계추는 움직였고 미국은 세상을 바꿀 거대한 전쟁으로 돌입하게 되었죠.


클레오파트라(?)


비록 발은 못생겼지만, 아버지 덕에 뭐 신을지 걱정은 해본 적이 없어요.

존 브라운 - 상 역사

세상은 아직도 불완전하지만 우린 더 이상 무기력하게 부당한 처우를 받아들이지 않죠. 

상대가 개인이든 집단이든 정부든지 간에, 우리에게 부당한 행동을 한다면 우린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싸워요. 

게다가 우리들의 민원과 신고를 들어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공무원과 법 집행기관이 존재한다는 건 (비록 힘없는 사람이 정당한 판결과 피해 회복을 받는 게 아직도 어려운 게 사실이고,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거기 맞서
 싸우는건 상당한 심사숙고가 필요하지만) 분명히 좋은 일이에요.



하지만 19세기 흑인 노예들에겐 그런 권리가 아예 없었어요. 그들의 운명은 온전히 주인에게 달려있었죠.

그들이 채찍질을 당하든 짐승 같은 대우를 받든 그건 순전히 주인의 마음이었어요.

물론 노예 하나하나는 재산이었기에 함부로 대하다간 손해가 나기 쉬웠고 의외로 인간적인 노예주들도 많았지만 악마 같은 노예주들도 분명히 있었죠.

남부의 노예사는 (북아프리카 이슬람 노예제보단 상당히 인간적이지만) 피할 수없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지만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인성으로 점철된 제도였어요.

하지만 남부 경제에서 노예제를 빼는 게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이는 어쩔 수없는 현실이나 심지어 이상적인 (흑인들은 무지하고 열등함으로 백인 노예 주가 잘 돌보아주어야 한다) 체제로 미화되기도 했는데 이런 상황에 무기력하게 있지 않고 '남부의 대의'에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은 북부의 공장주들뿐만은 아니었죠.

개인적 도덕과 신념으로 노예제의 실체에 대해 감정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던 북부의 어떤 글쟁이들은 잔인성이 엽기적 수준에 이른 갖가지 문제들에 대해 저주를 퍼부어 선량한 남부 농장주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는데 그들 중 과격파는 펜이 아니라 무기를 들어 노예주들을 겨누었어요.

존 브라운은 그 대표적인 사람이죠.

15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한쪽에선 광신도 테러리스트, 한쪽에선 성스러운 순교자로 불리는 이 사내는 1800년 코네티컷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미 독립전쟁에서 전사한 대위였고 아버지는 무두장이이자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의 설립 후원자였어요)비록 교회는 다니지 않았지만 경건한 복음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브라운은, 아버지가 탈출 노예들을 돕는 걸 어릴 적부터 지켜보았는데 이는 이후 그의 노예해방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을 거라 여겨지고 있어요.

아버지를 닮은 그는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진 고집있는 사람이었어요.

근면한 사내였던 브라운은 피혁공장을 지어 15명을 고용하고, 지역에 우체국 학교를 세우는 등 많은 지역 활동을 했는데 1831년 예상치 못한 재앙이 그를 덮쳤죠 아들과 아내가 병으로 죽고 사업도 기울더니 4명의 아이들을 더 병으로 잃은 거에요. 이후 그는 매사추세츠의 스프링필드로 건너가 노예폐지론자의 교회인 자유교회에 다니며 여러 인물을 만나며 노예 해방에 대한 결심을 굳혀갔어요.

그러던 중 그의 인생을 결정할 사건이 벌어졌는데 캔자스 준주에 살던 아들이 캔자스 준주의 노예론자들이 캔자스를 노예 주로 만들려 공격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 것이었죠.

당시 캔자스는 곧 정식 주로 승격될 가능성이 높은 준주였는데 캔자스의 노예론자들은 무장을 갖추고 노예반대론자들을 위협하는 일을 공공연하게 했어요. 새롭게 주로 승격될 캔자스는 노예반대론자와 노예론자들에게 놓칠수 없는 타겟이었고 
이는 '피의 캔자스'라는 일련의 유혈대립이 벌어지게 만들었죠. 다만 노예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노예주들이었고, 이들에겐 재산과 사업이 걸린 일이기에 보통 이들이 더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곤 했어요.


이에 분노한 브라운은 재산을 긁어모아 가족과 노예반대론자들을 지키려 캔자스로 건너갔는데 그럼에도 그는 내심 캔자스가 노예 해방 주로 무난히 정착할 거라 믿고 직접 총을 들고 싸울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보더 러피안으로 불리는 극렬 노예론자들이 보안관과 결탁해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지역신문사,노예반대론자 정착촌,상원 의원을 급습하고 노예 찬성 언론들이 이런 공격 행위들을 찬양하기 시작했자 브라운의 생각을 바뀌게 되었는데 (당시 브라운도 아들과 함께 총격을 당했어요) 당시 이들 공격을 찬양하는 기사를 보면 “우리는 북부의 침공을 단호히 격퇴하였으며, 캔자스를 노예 주로 만들 것이다.  설사 우리의 강이 죽은 자들의 피로 뒤덮이고, 노예 제도 폐지론자들의 시체가 너무 많이 쌓여 질병이 만연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우리의 목적을 단념치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극도로 호전적이고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죠.

거기다 캔자스 주도 은근히 노예제 찬성파를 밀어주었는데 캔자스의 지도자 찰스 로빈슨은 "위협을 했건 안 했건 모든 노예제 옹호파들을 오밤중에 암살하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할 것이다…. 캔자스에서 그러한 위협을 저지른 사람을 모조리 죽인다면, 그 시체를 묻을 땅이 모자랄 것이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죠.


노예 찬성파의 백주대낮 테러가 이어지는 불안한 상황에서 브라운이 존경하던 아버지의 부고가 전해지고, 전직 노예사냥꾼이자 노예 찬성론자인 도일 가문의 사내들이 노예 찬성론자들을 이끌고 브라운의 집을 포위해 협박하는 상황에 이르자 존 브라운은 마침내 결심을 했어요.

그는 아들들과 지지자들을 모아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도일 가문의 사내들과 두 명의 노예 찬성론자를 포타와토미 골짜기의 오두막에서 꾀어낸 다음 브로드 소드로 쳐 죽였죠.

노예론자들의 반격은 즉각적이고 맹렬했는데 헨리 페이트 대위가 이끄는 미주리군이 바로 브라운의 집을 공격해 파괴하고 아들 두 명을 생포한 거에요.

페이트 대위의 민병대는 곧이어 브라운의 캠프를 직접 공격했는데 브라운의 추종자 9명과 20명의 지역민은 이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페이트와 부하 스물두명을 포로로 잡았어요.
브라운은 아들 두 명을 풀어주는 대가로 페이트와 포로들을 풀어주었지만 미주리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죠.

미주리주는 노예주였거든요 (미주리 내에도 노예해방론자들은 있었지만 그들은 소수였어요), 그들은 대신 존 레이드 소장 휘하에 300명의 병력을 붙여서 캔자스로 진군해 브라운과 추종자들을 사살하라 명령했죠. 하지만 이들의 공격은 놀랍게도 겨우 38명의 브라운의 추종자들에게 격퇴당했어요.

브라운은 지형지물을 교묘하게 이용해 추종자들을 고지대 자연 엄폐물에 매복시켰고 미주리 군대가 들어서자 집중사격을 가해 60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죠.

이 '오사와토미 전투'로 브라운은 미 전역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는데 어이없는 패퇴에다 노예제 폐지론자가 이름까지 얻게 되자 대노한 미주리주는 브라운을 확실히 처치하기 위해 캔자스 준주로 2700명의 대군을 진군 시켰어요. 하지만 9월 14일 소규모 접전이 벌어진 직후 캔자스의 첫 주지사인 존 기어가 양측에 전투 중지 명령을 내리고 브라운에게 사면령을 내리자 캔자스와 싸울수 없던 미주리 군대는 떪떠름하게 캔자스에서 물러났죠.

이 사건으로 브라운은 자유주의자들의 영웅이자 노예론자들의 악마가 되었어요.



누진제에 대해..

전기 기관이 삶의 많은 부분에서 열기관을 몰아낸 이후로 

증기기관차는 철로 위가 아니라 박물관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어요.

그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전기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죠.

물론 그 전기를 만드는데도 아직 많은 화석연료가 쓰이지만

그 화석연료 값은 10년 전이라면 몇몇 선구자만 상상했을 정도로 엄청나게 내려갔죠.

이제 에어컨과 각종 전기 기구를 쓰는 건 더 이상 빅토리아 풍 소파에 앉아 손가락만 까딱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정부에선 전기를 적게 쓰는 저소득층을 위해 전기를 많이 쓰는 상류층에게서 많이 걷고 있다 하지만

그 적게 쓰는 사람은 전 국민의 3%뿐이고 중산층과 저소득층도 높은 전기료를 물고 있죠.

오히려 가난한 사람은 에어컨을 쓰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어요.

악법일수록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입법된다고 누가 그랬죠.

누진제야말로 그런 법에 합당할 거예요.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11배의 누진제가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초기 증기기관차의 태동 역사

예전에 프랑스의 천재학자이자 위대한 패배자 파팽의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죠.

그는 증기선뿐 아니라 증기 엔진으로 움직이는 수레까지 개발했지만 그의 발명품에 불안감을 느낀 엘베강 뱃사공 노조에게 습격당해 모든 발명품을 파괴당하고 거지가 되어 런던 싸구려 하숙집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죽었어요. 

당시 열기관에 미친 발명광에게 독일은 좋은 실험 장소가 아니었어요. 
사실 산업을 인력이 지배하던 시기에 '기계 운송수단 실험하기 좋은' 곳은 없었지만.
그나마 괜찮은 곳을 뽑자면 단연 미국과 영국이었죠.

물 이야기를 한번 했으니 땅 이야기도 해야겠죠?

당시 '땅'을 달리는(정확히 말하면 레일 위) 증기기관을 선도하던 건 영국이었는데. 1801년 트레비식이 주철 철로 위를 달리는 최초의 증기기관차를 발명했지만, 여러 문제가 있어 실용적이진 못했어요.

부침을 거듭하며 발전하던 증기기관이 마침내 운송수단에 한 획을 그은 건 1814년이었는데

조지 스티븐슨이 탄광에서 제련소와 각종 공장들까지 석탄을 운반할 증기기관차를(당시 석탄차는 말이 끌었어요) 를 연구하던 중 '제대로 된' 증기기관차를 만들어 낸 것이었죠.
(스티븐슨은 기관차 뿐 아니라 초기 철도의 여러방면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인데, 그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다룰 기회가 있을거에요.)
파팽만큼은 아니지만 몇차례 시끄러운 사건이 지나간 끝에 석탄 운반용 증기기관차가 마침내 자리를 잡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는데 그건 바로 석탄 가격이 70% 가까이 떨어진 것이었어요. 이는 다른 산업의 촉매제가 되었고 난방용 석탄의 보급에도 엄청난 폭풍을 가져왔죠.

증기기관차란 물건이 석탄을 운반할 수 있단 게 증명되자 좀 더 대담한 시도가 행해졌는데 바로 인간을 수송하는 것. 

맨체스터와 리버풀 사이에 제대로 된 첫번째 철도가 부설되었고 정기 화물,여객철도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시속 24km라는 경이적인 속도로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지금 보면 무척 느린 거 같은데 발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평균 24km로 달린다는 건 당시엔 센세이션이었어요)

물론 사람은 만족하지 못하는 '불만의 동물'이라 기관차의 속도도 점점 더 빨라졌고.

1829년엔 40km, 1840년엔 93km로 늘어나더니..

인간이 기관차를 발명한 뒤 51년 후인1852년엔 한 시간 동안 시속 104km를 유지할 수 있는 기관차가 유럽과 미국을 뽈뽈 돌아다니기 시작했죠. 

크램튼 4-2-0 "르 콩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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